김현경 교수(상담학과: BACC 디렉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예배 공동체이며, 능력 공동체이고, 사명 공동체이자 치유와 회복 공동체이다. 예배 공동체로서 우리는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며 영원히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높이기를 결단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임재가운데 만나주시고, 우리는 그 친밀한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더 구체적으로 확립시켜나가게 된다. 교회는, 또한, 능력 공동체이자 사명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며 분명한 비전과 사명을 교회에 주셨기에, 교회는 예수 이름 가운데 두신 거룩한 능력과 성령님의 인도 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어가는 영적 공동체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영적 공동체로서 반드시 드러내야 할 또 한가지 정체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치유 공동체로서의 교회이다. 감사하게도, 이 시대의 교회들은 예배공동체로서, 또 능력과 사명 공동체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전능하심, 그리고 의로우심을 선포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내는 것은 교회의 가장 근원적인 비전이자 목적이지만, 그 가운데 잊혀서는 안 될 것이 있다면, 바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며, 상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다. 상한 마음 가운데 묶여있는 성도들이 깊은 내면의 죄와 상처를 발견하고 상처의 영향력으로 잃어버린 소중한 관계와 삶의 영역들에 대해 슬퍼하며, 또다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로 세워나가는 일은 세상의 기관들이 아닌 바로 영적 공동체인 교회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성도들이 자기 자신과 이웃들의 상처와 죄에 대한 민감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전인적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서로를 긍휼과 온유함으로 섬기고 세워줄 수 있는 치유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상한 자들, 포로된 자들, 그리고 갇힌 자들이 치유되고 회복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신의 성품에 동참하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세워나가는 치유 공동체가 교회 가운데 뿌리내리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몇 가지 자원들이 있다.

 

첫째, 안전함이 있어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 있는 존재적인 불안감을 잠재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안전함이다. 시편 기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산성이자 방패 시며 높은 바위이시며, 피난처 되심을 고백한다.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존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시편 기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 안에 존재하는 죄와 연약함, 상처와 악함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힘이였음을 알 수 있다. 내면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자극하는 관계나 연약함을 정죄하는 율법적인 공동체에서 성도들이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자기 보호와 방어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자기 보호와 방어들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도 표면적인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자신들을 포장하게 만든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교회는 결국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만의 모임이라는 거짓된 메시지를 보냄으로 절실하게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쉽게 다가와 자신의 연약함을 보일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 절대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은 정직한 자아인식과 죄의 고백이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죄를 직면할 수 있도록, 자신 스스로 다룰 수 없는 죄와 상처의 영향력의 실체를, 그리고 하나님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려놓음과 순종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교회가 치유 공동체가 될 수 있으려면 상한 자들을 향해 하나님이 베푸셨던 긍휼의 메시지가 성도들의 관계에서 안전함으로 실현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수용과 존중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상대가 고백하는 모든 것이 정당하며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 실체의 존엄성과 인격을 존중하기에 그의 독특한 경험을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생각-감정-행동들이 정죄 감과 위협 없이 수용되고 존중될 때, 비로소 주관적인 자기 경험에서 이해했고 정당화했던 사건과 경험들을 하나님 진리의 기준 아래 객관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내면 안에 숨겨져 있었던 생각, 잊혀진 기억들, 억압되어있던 감정들은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관계 대상이 있을 때, 가르침과 정죄 감으로 방해하지 않고 인내하며 들어주는 치유 공동체의 사랑 어린 관심이 있을 때,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래서 깨닫게 된다. 얼마나 많은 상한 감정들이 내면 안에 쌓여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거짓된 생각에 스스로 속고 있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정당하다고, 피해자라고 생각한 그 많은 상황에서 실제 자신이 가해자였고 용서를 베풀 자가 아니라 먼저 용서받아야 할 자였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셋째, 긍휼과 우정이 있어야 한다. 치유 공동체 가운데 경험하는 동료의식이다. 약한 자들의 사귐이며 그 가운데서 경험되는 하나님 사랑과 은혜의 축제 현장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죄를 고하며,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아파하는 긍휼과 우정이 넘치는 공동체는 그들의 연약함이나 부적절함에 대한 정죄 감이나 수치심, 비교의식과 같은 위협적인 방해꾼이 침투할 틈을 얻지 못한다. 고통 가운데, 그리고 무너짐 가운데서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임을 일깨워주는 그 공동체 안에서 막힌 담은 허물어지고, 아무 거리낌 없이 서로에게 나아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치유와 회복을 결단하고 나가는 긴 여정에서 다시 넘어질 수 있으나 또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 때, 자신 스스로에서조차 잊혔던 삶의 의미와 가능성, 그리고 소망을 다시 붙들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이런 치유와 회복의 요인들 때문에, 장 바니에는 공동체란 ‘스스로의 약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용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우정을 나누는 자리’라고 정의했고 헨리 나누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의미 있는 단어 역시 온전한 영적 공동체 가운데 존재하는 긍휼과 우정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렇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예배를 사모하며, 거룩한 사명의 부르심과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기를 갈망한다. 그러기 위해, 그 거룩한 삶을 향해 나가는 이 땅에서의 여정을 모두 다 함께 갈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안전함, 수용과 존중, 그리고 긍휼과 우정이 있는 치유 공동체가 필요할 것이다. 인생의 긴 여정에서 겪게 되는 만만치 않은 위기와 문제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고 다칠 수밖에 없을 때, 성도는 서로를 돌보며 위로하며, 힘을 주고 또다시 소망을 확인시켜주는 치유공동체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 이런 공동체가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고립되어가며 인간의 진정한 만남이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회복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의로우심에 근거 하는 치유와 회복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그리고 모든 성도의 삶에서 선포되고 경험되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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